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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지금은 열매를 거둘 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 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 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장석주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 전문이다. 올여름은 유난히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 가뭄으로 인한 산불, 화재 그리고 폭우에 장마, 100도가 넘는 무더위를 무사히 견뎌낸 대추는 단맛이 한층 더 깊어졌을 것이다.     시련에 강해지는 것이 어디 대추뿐이던가. 모든 과일과 열매 또한 시련에 맛이 그윽해지리라. 대추가 그냥 저절로 붉어질 수 없듯이 사람도 마냥 나이가 들어가지만은 않으리라. 시인이 표현했듯이 그 작은 대추 한 알을 붉게 익히기 위해 태풍과 천둥, 벼락과 번개를 수천번 견디고, 둥근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덩이 같은 땡볕을 피해 몸을 둥글려 말고 바람에 수천 번 수만 번 깎여 둥글어진 것 일 게다. 대추가 혼자 익을 수 없듯 사람도 혼자 익을 수가 없다. 이 시의 마지막 행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에서 처럼 인간은 세상과 소통하면서 성장하고 성숙하여간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도움으로, 학창기에는 교육받으며, 청년기에는 친구와 직장 동료들과 교류하며, 장년기에는 가족의 응원과 위로를 받으며, 노년기가 되어서는 삶을 관조하고 열매를 거두며 정리하고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이 세상에는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항상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고받고 상생해 나가게 되어있다. 올여름은 짧았지만 수많은 재해를 동반했다. 세상에서 제일 안타까운 일이 천재지변이다. 인간의 잘못이라기보다 기후와 관계된 재앙은 어쩔 수가 없다. 단지 후처리에서 인간애를 발휘하는 지도자의 역량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대추가 태양열을 빨아들이듯이 우리는 청소년기에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인다. 지적 호기심이 가장 활발한 대학 시절에는 독서 모임과 명강의를 찾아다니며 자아 탐구에 급급했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선배들과 대화를 통해 배우고 경험을 쌓는다. 인간관계를 넓히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기반을 다진다. 전공을 확고히 하고 직업을 갖는다. 모든 관심과 노력을 한곳으로 모으고 직업에 최선을 다한다. 본인이 속한 직장과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외의 활동은 여가생활이고 생활의 균형을 잡아주는 보조역할로 조화를 이룬다. 사람은 저마다 재능이 다르므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일이다.     붉은 대추 한 알 속에 인고의 세월이 녹아있듯이 우리 인간 개개인의 삶에도 나이만큼 깊은 고난과 역경의 역사가 사려있다. 조석으로 가을의 서성댐이 피부에 와 닿는다. 낮에는 매미 소리, 밤에는 귀뚜라미 소리로 가을은 이미 채비를 마친 듯하다. 이제 머지않아 추수할 때가 올 것이다. 포도, 사과, 배, 감 등 바쁜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도 일생 보고 듣고 배우고 쌓아온 연륜으로 녹아난 열매를 거둘 때가 왔다. 그 열매는 눈에 보일 수도 있고 자신만 느끼는 성취감일 수도 있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자존감만 지켜줄 수 있는 열매면 된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예전에는 풍부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인품이 훌륭하면 존경받기에 충분했다. 인격이 고매한 한 스승을 잃으면 도서관 한 채가 불타 없어졌다고 애석해했다. 지금은 모든 기준이 바뀌고 있다. 모든 지식과 정보는 컴퓨터에서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지나친 정보의 홍수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가장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만 선택할 수 있는 혜안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 멋진 가을에 아름다운 축제를 준비해야겠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대추가 태양열 천둥 벼락과 귀뚜라미 소리

2023-08-25

[이 아침에] 가을 밤의 단상

마른풀 냄새가 난다. 풀 냄새는 머지않아 무서리가 찾아온다는 숲에서 보내는 아픈 시그널이다.   늦은 밤 책상 앞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등 뒤에서 갑자기 귀뚜라미 우는 소리. 이맘때가 되면 매년 찾아와 발등을 툭 건들고는 폴짝 뛰어 마룻바닥에 배를 까뒤집고 곤두박질치던 놈. 나는 의자에서 돌아 앉아 두리번거린다.   적막 속에 갇혀있는 나를 찾아온 먼 그리움. 적요의 시공(時空)이 잠시 출렁인다. 놈을 보면 아련한 소리가 먼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들린다.   장독대 뒤에 숨어 다투어 울던 귀뚜라미 소리는 내 유년에 껴안고 자던 자장가였다.   교복에 단정을 차리던 무렵 감이 익어가는 뒤뜰에서 들리던 귀뚜리 울음소리. 그런 날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펼쳐 놓고 책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백로 지나고 추분이 가까워오자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멎었다. 찻길에서 들리는 모터사이클 소리가 다듬질 소리 같이 들린다. 다듬질 소리는 이제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전설 속의 소리로만 남아 있다.   청년이 된 어느 날의 입동 근처. 저녁에 뜰로 나서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 뜰에는 몇 남지 않은 은행잎이 가지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또, 닥. 또, 닥. 또닥또닥또닥또닥. 먼 곳으로부터 아득하게 들리던 소리. 어느 정숙한 여인이 한복 저고리 단정히 차려입고 다듬돌 앞에 앉은 고운 모습을 나는 상상했다. 다듬질 소리는 장단에 가락을 얹어 운율적으로 들려 소리가 그친 후에도 긴 여음을 남겼다. 그 소리는 잊을만하면 들렸다. 늦은 밤에 들리던 다듬이질 소리는 큰길 건너 애자네 엄마가 만들어 내는 소리였음을 뒤늦게 알았다. 새 봄에 대학에 들어갈 애자는 그때로부터 다섯 해 전에 아버지를 월남 전선에서 여의었다. 앞길이 창창한 장교였던 그의 죽음에 이웃들은 한 겨울보다 더 시린 여름을 보냈다.   낭만적으로만 느꼈던 그때 다듬이질 소리의 의미를 50년이 다 된 지금에서야 알 것도 같다. 다듬이질 소리는 육자배기 타령이었고, 아니리로 풀어내는 한탄조의 중모리와 한의 절정을 휘모리장단으로 토해내는 청상이 된 한 미망인의 하소연이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고즈넉이 눈을 감고 졸지에 청상이 된 한 여인의 애끓듯 풀어내는 다듬이질 가락 한 토막을 베고 밤을 뒤척였을지도 모른다.   단풍을 보면 여리거나 짙은 얘기가 채색되어 있어 사연이 많은 잎일수록 곱다. 인생의 가을을 맞은 사람의 얼굴에도 아팠거나 슬펐던 한때의 모습이 수채화로 그려져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서정주 시인의 시처럼 생의 가을을 맞은 당신도 그래서 더 아름답다. 조성환 / 시인

20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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